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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는 곳

서지수
                                                                      

 

 

 

 

 

 

 

 

 

1.


전염병은 집이 인간이 사는 법에 기초를 이루는 자원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집에 머물라’는 명령은 집이 우리가 안전을 위해 물러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며,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할 수 있는 장소라는 암묵적인 이해를 수반한다. 우리는 집 없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할 수 없으며 우리의 새로운 관심사는 거주 환경에 대한 만족도가 되었다. 하지만 사회적 본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후퇴하는 공간 또한 집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집의 의미는 달라진다. 변하연은 코로나 19로 인해 발생하는 가정 폭력의 실태와 복지 현황을 참조하기 위해 각계 전문가 및 비공개쉼터 익명자와 대담을 진행하였다. 세 명의 증언자들이 화면을 가로지르며 발언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3인칭 아카이브>는 쉼터를 주거 공간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피해 주체가 보호 시설이라는 공간에서 마주하는 한계를 포착하고 속함과 속하지 않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발화한다.

 

아카이브는 추방의 행위에 대한 준거를 기점으로 나눠진다. 그것은 개별 기록들 간의 관계를 결정하고 위치를 고정시키는 영역을 보여준다.[1] 첫 번째 영역은 통제에 대한 욕구인 남성적 헤게모니이다. 고용 불안과 경기 침체 같은 사회적 불안을 겪는 부양자가 자신의 권력을 확인받기 위해 폭력을 행함으로써 헤게모니적 권력을 획득한다. 입지가 약한 자는 지배와 통제의 대상으로 받아들어진다. 두 번째 영역은 집을 안정적인 장소로 고정하여 집 안에 머물기를 요구하는 방역 지침이다. 감염병으로부터 안전한 장소로서의 ‘집’[2]은 피해 주체를 폭력이 발생하는 장소에 가둬버리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야기하며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사회 기관의 역할마저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세 번째 영역은 가정을 외부에서 개입 불가능한 사적 영역으로 간주하는 행위이다. 폭력은 집안 문제로 인해 결정되는 일이며 그것이 발생하는 원인은 가족의 몫으로 가해자와 더불어 나머지 가정 구성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시각이다.

 

증언을 렌더한 몽타주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이 서로 뒤섞여 붕괴되고, 가정 폭력을 폭력이라고 인식할 수 없게 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것은 가부장적 질서의 견고성과 그 질서에 도전하는 것의 비극성 그리고 그 질서에 적응하는 것의 일상성이다[3].  몽타주는 통제와 구속을 강화하는 지배 기제가 가부장적 잔재임을 선언하고 저항에 은폐를 기리는 기술을 신화라 명명한다. 그러므로 아카이브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신화가 된다. 신화는 ‘가정의 문제, ’사적인 영역, ’‘개인의 팔자’와 같은 단어를 씀으로써, 폭력을 안락한 가정이라는 외피로 감싸고 피해자가 존재의 정당성을 회복하는 대신 스스로를 비존재로 전락시켜 불가결한 사회를 지속시킨다는 점에서 재고 되어야 한다. <3인칭 아카이브>는 번역 가능한 사회적 명제의 모습을 보여주는가? 이 명제는 현실의 변화인가, 아니면 행위자의 변화인가? 장 뤼크 낭시에 의하면 신화는 정확히 한 세계를 솟아나게 하고 한 언어를 도래하게 하며 하나의 새로운 인간성은 자신의 새로운 신화로부터 출현한다.[4] 작가는 공동체의 실현이 실패한 것을 신화에 의해 수반되는 가부장적 이미지라 정의하고 신화가 지닌 보편적 가치를 조감적인 시선에서 직조한다. 

 

2

 

투명한 광물들이 담긴 여섯 칸의 캐비닛과 사방에 널브러진 하얀 재는 설국의 원경이며 두 마리의 생선이 낚싯줄에 연달아 매달린 채 몸을 벽에 의거하는 모습은 삶과 죽음의 배색이다. 전시 공간에서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은 바닥에 퍼진 하얀 재로 인해 설치를 오브제 자체가 아닌 하나의 풍경으로 받아들이는데 여기서 재는 포획 주체를 분별함과 동시에 타자가 지닌 지배적 위치를 무화 시키는 의도로서 작용한다. <들여다보려고 애써야 한다>와 <개인적 불운>의 제목이 지시하는 것처럼 관객이 대상을 향한 심상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향해 한 발 나아갈 때 비로소 작품을 향유할 수 있다.

 

캐비닛 안 오목 렌즈와 생선의 피부에 새겨진 문장은 음절의 미세한 형태와 언어의 온도를 디테일하게 확대하여 보여줌으로써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불가촉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왜 진작 헤어지?’ ‘안 문제를 누가 그렇게 키우?’ , ‘맞을만하니 맞았겠’ , ‘너 때문이다’ 같은 솔기가 있는가 하면 ‘니가 잡힌 건 운이 없어서’, ‘ 그러게 잘 피하지 그랬어’  같은 치클도 있다. 유심히 보아야 할 점은 모두 다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음성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조소가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들 눈에 각인된 성의 역할과 성의 불평등 자체가 대부분 자신의 머릿속에 내재된 상투적 이미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것은 사회의 정념과 잔재, 그림, 사진, 텔레비젼 등 시각매체로 얻은 이미지를 포함한다. 이와 같은 참상은 앞서 논의한 신화의 불활성을 복기하는 장으로 사회가 재난을 개인의 불안으로 치부하고 주변자를 의미 없는 소음으로 취급해 편집의 대상으로 식별하는 점에서 집단이 개인을 압출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반면 오브제 전원은 개인적인 동기에 그치지 않고 경험을 전반으로 주제를 보편화하여 이야기를 개진해나아가는데 이때 오브제는 실재를 기록하는 도큐먼트의 역할을 넘어 행동하는 파리아[5]의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함께 나타남’ 의 행위를 통해 공동의 기원을 인식한 별개의 집단이 공동의 주체가 됨으로서 이상에 부합하는 신화적 모델의 생산을 요식하는 화각을 파기한다.

 

3

 

작품 내 공동 목소리를 부여하여 쫓겨난 자들로 하여금 경험을 사유할 수 있는 인식의 토대를 마련하고 만들어낸 세계에서 더 넓은 세계로 이행한다면 <이동 불가능한 사랑과 이동 가능한 수식>은  다성적 요소에 얽혀진 관계의 용법을 재고할 수 있는 서술적 형태로서 원형 안 물체가 서로를 감지하거나 치유하기도 하면서 한 형태의 다양한 욕망의 목소리를 엮어낸다. ‘사랑’과 ‘수식’은 작가가 타인의 삶과 환경에 접속하기 위해 채택한 전술로 그의 조건을 성찰하고 있는 가운데 자기 안에 타자들을 포함시키는 부분이다.

 

의미를 가늠할 수 없는 혼종의 양태를 띠는 화환 리본, 숫자를 계산하는 주산기, 강아지 털의 소재가 각각의 동일한 갈색 원형 판위에 서있다. 원의 곡률로 인해 모두 다른 각도를 고수함에도 전체적으로 통일된 인상을 준다. 소재는 주조를 가하지 않은 산업 재료로 사회문화적 함의를 상연하는 메타적 플롯을 암시하며 원형 판은 커뮤니케이션의 매개 장치로 코드의 해독이나 고통의 재현 방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의미 체계를 성립화하는 데 있다.

 

분홍 리본은 경사에 쓰이는 물건으로 남의 좋은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축하 인사의 뜻이자 관계를 확인하는 연대의 입맞춤이다. 타인과의 감정을 공유하며 생의 대소사를 함께하는 리본은 그 자체로 친숙한 것으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이입하는 태도를 환기한다. 한편 리본은 직함을 기입하는 명찰로 타인과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분별하는 구별 짓기를 시도하는데 연대와 해리의 기묘함이 뒤섞인 리본의 특징은 작품의 수식을 풀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라 볼 수 있다. 작가는 ‘가정의 평화 화목한 가정’이라는 문구를 리본에 새김으로서 타자와 주체를 잇는 발신자-송신자의 영역을 파쇄하고 ‘평화’와 ‘화목’을 준거 영역으로 설정함으로써 인류적 차원의 생장을 구축한다. 인류로서 서로 가지는 사랑을 영원히 붙들고 싶은 둥근 리본이 개체를 냉철하게 분석하는 시각을 담지한 주산기의 코 끝을 감싸 안아 이성의 차가움을 상쇄하고, 현상을 조망하는 인식을 터득한 주산기가 자신 옆에 놓인 털을 보드랍게 어루만지면서 인간의 관계를 성찰하게 하는 정서적 지형을 그려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관계를 구축하는 측면이 물질적 요인이 아니라 관념적 요인에 의해 형성되며, 관념적 요소는 집합적으로 보유된 요소로서 행위자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동력임을 확인한다.[6]

 

특수성의 영역을 보편성의 광장으로 얼마만큼 가져오느냐에 따라 신(scene)의 시퀀스가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이동 불가능한 사랑과 이동 가능한 수식>에 이어 재생되는 <대화1> 과 <대화2>는 당신이 수식해야 할 대상이 지금 여기 눈앞에 있음을 알린다. 화면 가운데에 제시되는 구는 음절의 반사와 굴절을 빚어내는 파동의 현현으로 음성이 외부에 송출되는 상태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한다. 음운이 시각에 떨림을 전가하는 방식은 어미 배 속에서 꿈틀거리는 태아를 품어내는 태동처럼 고요하다. 얇은 천이 모니터 상부를 감싸 잉태된 익명의 존재를 보호하고 관람자는 스크린 위로 내려앉는 풍경으로부터 덧없는 연약함을 발견한다. 이는 음성이 풍경을 변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물리적인 접촉이 그 음성 자체를 구성하는가를 강조한다.

 

은유의 시학을 통해 우리는 변하연의 설치 전반에서 감지되는 박애의 정서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이해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원이다. 원은 사물과 세계 사이를 현상할 뿐 아니라 해체된 환경과 전복적 욕망을 이면화하며 관객들에게 집단적인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대체 이해를 창출하도록 고무한다. <들여다보려고 애써야 한다>와 < 이동 불가능한 사랑과 이동 가능한 수식>뿐 아니라 < 대화 1>과 < 대화2 >에서 역시 시각적 몽타주는 원이다.  원의 미학에 의존해 공동체의 완결성을 현상하려 했다는 점에서 행보의 근간이 된 < 3인칭 아카이브 >는 곧이어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질문으로 집약된다.

 

4

 

변하연은 쫓겨난 자[7]들의 구역을 사유하고 동화와 해방의 지표를 살펴보며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장소의 목록을 만들어나아갔다. 폭력이 발생하는 원리와 조건을 탐색하여 공동체의 생성 조건의 틀을 마련하고 저항적 행위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에 숨을 불어놓은 것이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전제에 의해 뒷받침 되는데 그것은 바로 공존이다. 한 세계가 다른 것들과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거나 혹은 어떤 세계가 타자를 제거하려고 들 때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일은 불가능하다.[8] 만일 그러한 사태가 벌어진다면 인간의 기본 조건인 복수성은 파괴됨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부름받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공동체에 대한 전망을 바탕으로 작가는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반역성의 추출을 시도한다.

 

반역의 세계에서는 집단이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세계를 유형화하고, 유형에 속하지 못하는 개인은 낙인찍기를 통해 주권이 박탈되어 장소에서 내쫓기는 경험을 한다. 이때 호출되는 것이 바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경계이다. 정상은 집단의 통계상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로 비정상은 평균 분포에서 벗어나는 편차이다.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하는 척도에는 안도와 불안의 호흡이 얽혀있다. 정상은 집단에 속할 수 있는 자로 안전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어지는 반면 비정상은 집단의 특성에서 벗어난 자로 무리에 속할 수 없는 공포를 갖게 된다. 작가가 발견한 것은 정상이 지닌 절대적 가치가 사람을 복종시키고 개인을 통제하는 폭력의 수단으로써

사용된다는 점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시각을 벗어나야만 세계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변하연의 믿음은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가족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본질은 결국 원인 것을>과 <어디에도 비정상적인 조합은 없다>는 이원적인 구조를 구축하여 고정적인 시야를 타파하고 배척되는 이상과 비-이상의 구분지를 조망한다.

 

5

 

<본질은 결국 원인 것을>은 이중의 계면을 투사한다. <대화 1>과 <대화 2>가 이원적인 구조를 통해 ‘안’과 ‘밖’을 사유한 점을 고려할 때 <본질은 결국 원인 것을> 은 ‘나’와 ‘너’를 사유한다. 연작 <대화> 에서 피해 주체를 내부에 잉태된 태아이자 외부에서 보호하고 감싸야 할 대상으로 묘사했다면 <본질은 결국 원인 것을>은 태어난 자들에 위계를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고찰로 변화되는 정체성은 무엇인지에 관한 논의이다.

 

작품은 제 1 계면과 제 2 계면으로 구성된다. 제 1계면은 원 속에 원이 포개지는 세계로 온전히 태어난 자와 기능이 불구한 자가 나란히 동일 선상에서 내보인다. 외형이 상이한 물체가 병렬 구조로 배열됨에 따라 관람자는 물체를 비교하기 시작하는데 신기한 것은 온전히 빚어진 형태보다 무엇도 전달할 수 없는 기이한 존재에 눈길이 간다는 점이다. 매끈하고 유약하게 빚어져 미적 판단이 가능한 존재와 다르게 쪼개지고 삐뚤고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이 불순한 존재는 원이 구현되는 세계에서 부름받지 못한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박탈된 자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일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우리의 판단이 작동되고 있음의 표현이며 존재를 포획하고자 하는 집단의 야만성과 같다. 제 1 계면이 상이한 외양을 통해 사물을 현상한다면 제 2 계면은 원 안에 원이 나누어지는 세계로 동일한 외형을 중층적 구조로 배치하여 배치 그 자체에 의문을 갖게 한다. 개체 모두 동일한 색과 크기를 지니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각각 다른 위치에 근거하는데 설치 구성을 보며 관람자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환경이 달라도 우리가 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닌가 혹은 위치와 장소를 배정하는 힘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들 말이다. 결국 이 형상은 개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판단에 관해 의문을 갖게 한다.  ‘왜 우리는 서로를 가르고 판별 짓지 못해 안달 났나 본질은 결국 원인 것을’

 

6

 

<본질은 결국 원인 것을>이 계면을 이용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판단 의식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한다면, <어디에도 비정상적인 조합은 없다>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반군하는 상이한 정체성의 서사로 해방을 통해 체제 전환의 과정을 평화적으로 수행한다.  투명한 비닐을 덧대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밀폐된 내부 공간을 창조한 구조물은 다섯 개의 환경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각각의 구역에는 테니스공, 탁구공, 야구공이 골고루 담겨 있는데 격조 없이 취급되는 공의 행간을 마주하는 감정은 낯섦의 극단이라 할 수 있다. 공이 공으로서의 존재를 개방하려면 공을 쳐주는 물건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공들은 배트는 커녕 공기조차 통하지 않는 낯선 공간에 담겨 그 안에서 자급자족하라는 임무가 배급된다. 불편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공들은 배트가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외양을 지닌 존재와 조우하게 되고 다름과 같음 그 차이 속에서 서로를 이해해 나아가면서 누군가를 이기고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플레이어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존재를 새로이 정립해 나아간다. 이처럼 일치가 아니라 불일치에서 파생하는 공통의 감각은 타인과의 공존을 받아들일 때 시작되며, 공통의 감각은 소통과 인식 자체에 기반이 될 수 있다. 타인과의 만남에 의해 획득하고 변형되는 속성인 것인 만큼 그것은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고 화해와 평화를 넘어 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쫓겨남은 삶의 터전에서 물리적으로 추방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삶으로부터 배제되는 것도 포함한다. 이러한 추방과 배제를 통해 쫓겨난 자들은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이들에게 생존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과 요구를 포함한다” [9]

 

존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발화를 이어가면서 자신의 존엄을 되찾기 위한 자기 구성적 행위를 생성한다. 명시된 존재들은 과거의 경험에서 출구를 찾기 위해 사유를 멈추지 않으며 스스로를 행위자로 승화시켜 시간의 축을 횡단한다. 그런 연유에서 이들의 삶은 동일한 이름으로 함께 행위 하며 정치적인 연대를 구성하는 수행적인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힘은 여전히 배제와 추방의 지대에 놓인 ‘낯선 이웃’의 목소리가 투쟁에 응답하기를 요구한다. 추방된 자가 말하기의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저항력을 확인하고 자신들을 내쫓은 자리에서 다시 한번 삶의 형식에 개입할 때 이 감각은 살아난다.

 

 

 

[1] 히토 슈타이얼, 안규철 옮김 『진실의 색』, 워크룸 프레스 , 2019, p.59.

[2] 김효정 『팬더믹의 젠더화된 효과』, The Women’s Studies 2020. Vol. 107 No. 4, (2020년 7월), 19쪽

[3] 신제원  『김유정 소설의 가부장적 질서와 폭력에 대한 연구, 국어국문학회 175호 (2016년) 초록

 

[4] 장-뤽 낭시, 박준상 옮김『무위의 공동체, 인간사랑, 2010,p.118

[5] 소수자, 주변인, 아웃사이더로 이해되기도 하는 파리아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한 내쫓긴 자를 의미한다. (양창아,『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이학사, 2019)

 

[6] 구성주의『https://ko.wikipedia.org/wiki/구성주의_(국제_관계)』참조

[7] 소외된 자를 지칭한다. 여기서 소외는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자이다. (양창아,『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이학사, 2019)

 

[8] 양창아,『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이학사, 2019

[9] 양창아,『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이학사, 2019 p.257

                                                                                                                                                                                                               시각미술가 / 비평가 서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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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는 곳에서,
당신이 살 수 있는 곳으로 

​정윤선

1

교통비가 반으로 줄었고, 식비도 조금 줄었다.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니 시간도 절약되었다. 사회적 활동에 물리적인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꽤 경제적인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비대면의 경제는 절약 이면에서 또 다른 자원을 필요로 했다. 그 자원이란 '개인적 공간'이었다. 온라인으로 수업할 때 화면에 가족의 모습이 나오거나 주변의 소음이 끼어들면 타인에게 피해가 될뿐더러 사생활이 드러나기 때문에 시각적, 청각적으로 방해가 없는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각자 구별된 공간보다 구별되지 않은 공간이 더 많았던 우리 가족에게, 서로의 방해가 없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화상 수업', '재택근무'처럼 다양한 활동이 '재택형'으로 변화하는 데에는 '누구나 개인적인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공간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화상 수업에서 주변의 간섭을 느끼며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비디오 화면을 끈 채 모습을 감추어야 했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쉽고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공간의 부족은 팬데믹 시대에 특히 치명적이다.

개인적인 공간을 가지지 못한 사람 중에서 비대면 시대에 더욱 취약한 이들은 가정에서 폭력을 겪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집은 폭력의 주체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장소인데, 코로나19(COVID-19) 방역지침은 활동 범위를 주거 공간으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활동 범위의 제한은 가족 외의 사람들이 피해자를 마주치기 힘들게 하여 가정 내 폭력을 한층 더 보이지 않게 한다. 가해자의 논리에서 폭력을 가할 이유는 늘고, 폭력을 가하지 않을 이유는 줄어든다. 방역지침이 강화되는 사이, 폭력은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서 더 짙어진다.

 

2

어두운 수면 아래를 길어 올리는 변하연의 <들여다보려고 애써야 한다>는 작고 흰 돌과 흰색 실이 만든 웅덩이로 전시장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돌과 실로 이루어진 웅덩이 위에는 투명한 유리 상자 6개가 서로 맞닿아 있고, 작고 흰 돌은 또 한 번 유리 상자의 바닥을 채우고 있다. 새하얀 돌 위로 짙고 검은 글씨가 보인다.

 

“왜 진작 헤어지지…어”

“맞을 만하니 맞았겠…”

“사람이 나빠서 그런…아니니 참고 살아”

 

문장 위에 놓인 납작한 투명 구슬은 중앙의 글씨는 더 크게, 가장자리의 글씨는 더 작게 보여준다. 때문에 문장은 한두 글자가 사라진 채로 읽힌다. 하지만 원래 문장을 추론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람이 나빠서 그런…아니니 참고 살아”.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이 문장들의 변주를 나도 한 번쯤은 들어본 것 같다. 눈에 띄는 확대된 문장과 기시감을 일으키는 사라진 글자는 성찰 없이 내뱉는 습관적인 말들에 대해 유심히 생각하게 한다.

   낯설지 않은 문장 사이에서 시선을 위로 올리면 낚시찌에 매달린 물고기를 닮은 형상이 두 덩이 보인다. 그 위로 “니가 잡힌 건 운이 없어서”, "그러게 잘 피하지 그랬어"와 같은 심상치 않은 문장이 쓰여 있다. 그런데 이 덩어리, 처음 보았을 땐 물고기 같았는데 한 덩이의 몸체가 주황빛이다. 형체도 물고기를 정확하게 재현했다기에는 오묘하다. 주황빛과 길쭉한 형체가 인간의 몸체를 떠오르게 한다. 아무래도 작품의 제목 <개인적 불운>에서 '개인'에 해당하는 것이 물고기만은 아닌 것 같다. 다른 한편에 놓인 영상 작업 <3인칭 아카이브>는 코로나19로 인해 심화된 가정폭력 문제를 주제로 사회복지학부 교수와 한국 여성의 전화 상담 팀장, 가정폭력 쉼터 시설장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영상 속 전문가는 코로나19가 가정폭력에 미친 영향뿐만 아니라, 가정폭력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문제 해결을 힘들게 하고 있음을 전해준다. 영상을 보고 나니 낚시찌에 달린 것을 보며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던 이유, 그리고 한두 글자가 빠진 문장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완전한 문장을 떠올릴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작품 속 문장은 오늘날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흔히 경험하는 편견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변하연은 우리 사회가 가정폭력 문제를 얼마나 '개인적이고', '피해자가 자초한',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작품을 통해 이야기한다.

   집의 의미를 네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전시 《당신이 사는 곳》에서 변하연 작가는 팬데믹 시기에 가정폭력을 겪고 있는 여성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작가는 이 여성들이 마주한 관습적 편견뿐만 아니라, 이들이 가정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을 살펴보는 데까지 나아간다. 팬데믹의 폐쇄적 특징이 피해자를 물리적으로 통제한다면, 피해자를 정신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형태의 '정상 가족'이라는 관념이다.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그들을 폭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게 한다.

 

3

깨진 상태로 모여있는 조각난 원도 있고,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찌그러진 원도 있다. 손으로 빗어 만든 송편처럼 겉모양에 손자국이 남아있는 원도 있다. 또 어떤 원은 속이 비었고 어떤 것은 모양 그대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동그란 모양의 틀 안에 들어간 원도 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원도 있다. 색도 한 가지가 아니다. 작품 <본질은 원인 것을>은 여러 형태의 원을 모아놓고, 원은 깨지거나 찌그러져도 여전히 원이라고 불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작품 <어디에도 비정상적인 조합은 없다>는 집단의 정상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품을 이루는 정사각형 캔버스와 그 위에 놓인 스포츠용 공은 투명 비닐로 압축되어있다. 정사각형 캔버스 위에 놓인 공은 다른 공과 함께 있거나 홀로 있다. 여기서 공은 어떤 공과 함께해도 좋고 함께하지 않아도 좋다. 스포츠용 공이지만 튕기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둥근 것을 바라볼 때, 사실 이상적인 형태의 원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찌그러진 원도 타원이라고 부르고, 반이 잘린 원도 반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머릿속에 떠올린 모양과 다르더라도 충분히 그것으로 불릴 수 있기 때문에, 작가는 원을 모든 형태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이 원은 개개인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도 생긴 모양은 다 다르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원은 부-모-자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공동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 여기서 원은 누군가 부여한 용도에 따르지 않아도, 비슷한 모양끼리 있거나 그렇지 않아도, 숫자가 많아도 적어도, 심지어 홀로 있어도 충분하다. 변하연의 작품에는 다양한 모양과 다양한 조합이 공존하지만, 무엇도 그것을 부르는 이름에서 소외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비정상적인 사물도, 비정상적인 조합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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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가족'이라는 관념은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게 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개인적으로 만든다. 우리는 관습과 편견에 물든 언어 속에서 희미해진 폭력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우리 사회에서 정상성의 기준은 너무 뚜렷하다. ‘폭력’을 재단하는 기준이 분명해지고 ‘정상성’의 기준은 보다 흐릿해질 때, 우리는 문제를 직시하고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상적인 원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고, 찌그러지거나 반이 잘린 모양도 '우리'라고 불러 보자. 이 안에서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넘어서서, 자신을 돌보고 서로를 돌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단순히 ‘사는 곳’을 넘어서, 당신이 충분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나아갈 것이다.

비평가 정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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